안녕하세요! 인하인 여러분 :-) 국어교육과 김영교수님(64)과 무려 3시간 동안 인터뷰가 이뤄졌습니다. 내년에 정년퇴임하시는 교수님 인생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는 자서전과 같은 특별한 인터뷰였는데요. 연륜이 묻어나는 깊이 있는 인터뷰를 지금 만나볼까요!
시골소년이었어요. 책읽기를 좋아했고 내성적인 성격이었어요. 형님 두 분이 항공공학, 전기공학 공과생이었어요. 기능적이고 실용적인 것도 좋지만 저는 꿈꾸고 아름다운 이상, 가치들을 추구했었죠. 그런 것을 좋아하다보니 한국문학을 공부하게 되었고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저도 국어교사가 돼서 춘천이나 중소도시와 같은 조용한 곳에 가서 책을 읽으면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었어요. 그런데 학부를 졸업할 때쯤 되니까 내가 공부한 게 너무 부족하더라구요. 아이들을 가르칠만한 수준이 못 된다고 느꼈어요. 공부를 조금 더 한 뒤에 가르치는 게 어떨까 싶어서, 대학원을 진학하고 어떻게 하다보니까 석사 과정을 끝내고 박사 과정을 가게 되고 운 좋게 29살에 대학 전임 교수가 됐습니다. 이건 능력이 아니고 어떻게 세월을 잘 만나 우연히 기회가 와서 그런 거예요. 여러분 절대로 실망하지 마세요! 저처럼 소 뒷걸음질하다가 쥐 잡는 수도 있어요. 저처럼 평범한 사람도 책을 읽다보니까 교수가 될 수도 있어요. 그건 내 뜻도 아니고요. 사회에서 틈이 하나 나서 나처럼 평범한 사람이 교수가 될 수가 있었죠. 마음껏 책을 보고 공부하고 내 자신을 가꾸고 세상을 인간답게 만들고 유교에서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고 해요. 자기를 가다듬고 남을 바로잡고 세상을 좀 더 정의롭고 인간다운 세상으로, 이런 것들을 꿈꿨죠.
지금까지 운이 좋게도 사회에서 많은 좋은 기회를 가졌었죠. 그래서 환갑이 넘은 요새는 우리 과에 매달 25만원씩 총 천만원을 기부하고 우리 학교와 밖 10군데 정도 매달 만원에서 오만원 사이를 봉급에서 기부하고 있습니다. 이거 처음 공개하는 겁니다. 부끄러워서 오른손이 하는 걸 왼손이 모르게 해야하는데, 제가 자랑하는 게 아직 모자라서 그래요. 그렇지만 이렇게 이야기하는 건 자랑이라기보다 교육적으로, 선생님이 육십이 되어 가면서 저렇게 마무리를 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나, 알려주고 싶은 뜻도 있어요. 요새는 전국의 중․고등학교에 드림 렉처를 합니다. 3~4년부터 일 년에 4차례 정도 하는데요. 가서 무료로 강의해주고 제 책에 싸인을 해서 아이들에게 나눠줘요. 예전에 비해 머리가 나빠져서 몸으로 뛰는 걸 해요. 성의를 보이는 걸로.(웃음) 어려운 사람들 옆에 가서 같이 있어주고 손잡아 주고. 세월호 가족들, 2년 전부터 세월호에서 아이를 잃은 단원고 학부모들의 그 심정이 얼마나 어려워요. 그래서 지난 겨울은 주로 광화문에서 토요일 2~3시간동안 그 가족들과 함께 있었어요. 그랬더니 굉장히 힘이 되는가봐요. 내가 담요를 뒤집어 쓰고 그 사람들이 집회할 때 같이 했더니, 그 사람들이 용기를 많이 얻더라고요. 또 제 친구가 을지로에서 노숙자들을 위한 봉사를 하는데, 거기에 도네이션도 하고 가서 돕기도 합니다. 보이지 않게 하고 있어요. 제가 월요일부터 학교에 있는 것만 보겠지만 밖에서는 그런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학생들과 함께 서로 가르치면서 배우는, 환원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젋을 때는 공부하고 나이 들어서는 세상을 인간답게 평화롭게 정의롭게 전적으로 봉사하는 일에 더 신경 쓰고 있습니다. 이제껏 학교에서도 책을 보고 논문을 쓰느라 바빴고 사대학장과 교육대학원장으로서 인천시내 교사들의 재교육에도 힘썼습니다. 지난 2년 동안은 인하대 교수 840명을 대표해 교수회 의장으로 교수들의 전문적인 자율성 신장, 성찰, 사회 발전을 위한 지식인의 역할 그리고 대학의 민주화 등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대학이 권위주의화 되고 자본이 굉장히 영향을 많이 미치고 있는데요. 이로부터 독립적으로 소수의 자본가들뿐이 아니라, 많은 국민들이 인류의 평화와 권리 등을 위해서 대학이 뭘 해야 할까 담론을 생산하고 대학의 목표를 환기하는 입장에서 2년 동안, 올해 2월까지 말씀드린 활동을 했습니다.
동인천 인천 아트 플래폼에서 ‘인천 시민을 위한 한국 고전 문학 명작 특강’을 한 적도 있습니다. 연암 박지원을 통해 요새 ‘실직’, '실업‘ 문제가 젊은이들의 고민인데 조선의 연암 박지원이라는 대실학자가 그 당시에는 그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 오늘날 문제의식을 가지고 조명하는 특강을 했습니다.
우리 대학에서 가야하는 길이 두 가지인데요. ‘지혜의 길’과 ‘자비의 길’이에요. 지혜와 자비의 길을 스승과 제자가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며, 서로 가르치면서 배우고. 사실 누가 주인이 되고 누가 객이 되는 게 아니라 다 함께, 대학이라는 곳은 모두 성숙한 성인들이 공부하는 곳이라 지혜의 길과 자비의 길을 서로 격려하며 질문하고 모색도 하는 대화의 시간, 만남의 시간을 갖기 위해 사범대학만이 사제동행 행사를 하고 있어요.
사제동행을 사범대학만 할 필요는 없고 교육을 하는 모든 단과대학이나 모든 모임에서 하는 것은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사대학장을 할 때 2층에 사제동행이라는 액자를 만들어서 걸어놨습니다. 인하대 사범대학은 사제동행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리고 학장일 때 길도 내놓았습니다. 서호관에서 5호관으로 가는 길의 이름이 ‘사제동행로’입니다. 사학과 교수들이 제가 만들자고 해서 만들었다고 ‘김영로’라고 부르기도 하더라고요. 그렇지만 공식명칭은 사제동행로, 스승과 제자가 함께 걸으며 학문을 논하고, 여친과 남친이 걸어가며 사랑을 논하고, 선후배가 함께 걸어가며 서로 격려하고 대화를 나누는 그런 길이 되길 바랍니다. 위험한 차도로 다니지 말고 안쪽인 사제동행로로 걸으세요.
▲ 2016 사제동행 모습
재작년에는 인천 근대 문학관을 방문하고, 작년에는 세종음악기행을 갔습니다. 올해에는 세종마을에 윤동주의 하숙집, 이상이 살던 곳, 송강 정철이 태어난 곳 그리고 겨레의 스승인 세종대왕이 태어난 곳. 그 현장을 우리 학생들과 방문하면서 그 분들의 사상, 문학에 대해 학생들과 생각해보는 세종마을의 서촌기행을 갔다 왔습니다. 통인시장에 가서 엽전으로 음식을 사 먹고 커피도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옛날엔 내성적이고 소극적이었어요. 그런데 살다보니까 ‘지행일치’가 돼야 하는구나. 말만 생각만 해서는 되지 않는구나. 말하는 걸 행동으로 해야 변화가 있구나. “정의롭게 살아야 한다.”, “참 되게 살아야 한다.”, “민주적으로 살아야 한다.” 말만 해서는 아무것도 변화되는 게 없더라고요.
이불 속에서 “민주주의여 만세”해도 아무 소용이 없더라고요. 길거리에서 ‘민주주의여 만세’해야 사람들이 듣고 언론에 나고 광장에서 이야기해야지. 그래서 조금씩 조금씩 제가 하는 말을 행동으로 실천으로 옮겨 보려고 노력했어요. 그러려고 굉장히 노력을 했어요. 요새도 사실은 겁나죠. 광장에 가면 전투경찰들도 있는데 제가 가서 잡혀가면 어떻게 하나, 두려움이 없는 건 아니죠. 하지만 그런 두려움보다도 자유나 민주주의를 실천해야겠다는 그 열정이 강하기 때문에, 그 두려움을 극복하고 용기를 내서 나가는 거죠. 안 그래요? 광화문에 수백대, 수천대 전투경찰차들이 포위해 있는데 거기서 현 정부를 비판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이죠. 나도 여러분처럼 겁나요. 그렇지만 두렵다고 아무도 말하지 않으면 계속 노예 상태로 사는 거죠.
예전에는 대통령을 지금처럼 국민투표로 뽑은 게 아니라, 장충체육관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간접투표로 뽑았어요. 이에 대해서 아무도 항의하지 않았으면, 지금도 아마 체육관에서 뽑고 있을 거예요. 그런데 박종철군이나 이한열군 같은 사람들이 죽음으로 항거하고 투쟁해 올해가 광주민주항쟁이 일어난 지가 36주년이 됐죠. 광주 민중들이 군부독재에 대해 피로써 저항하지 않았으면 민주주의가 달성됐을까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저도 약간 두려움도 있지만 행동을 하려 하죠.
그런데 처음부터 제가 행동을 하던 사람은 아니었어요. 굉장히 조심하고 신중하고 ‘왜 학생들이 돌을 던지나?’, 평범한 고등학생·대학생이었거든요. 두려웠죠. 겁먹었죠. 그런데 점점 공부하다 보니까, ‘머릿속의 생각과 말만 가지고 되지 않는구나!’를 깨달았어요. 실천하지 않는 민주주의는 안 돼요. 김대중 대통령이 ‘행동하는 양심’이라는 말을 했죠. 개인이 혼자 양심을 지키며 산다 해도, 역사가 바꿔지지 않죠. 실천하고 행동하고 연대해 넥타이 부대까지도 들고 일어나니 정부에서도 직선제를 하겠다고 항복하고 정권 교체가 된 거죠.
‘독서불망구국(讀書不忘救國)’이 내 철학이에요. 독서를 하되, 나라가 망할 때 구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책을 읽고 있는데 나라가 망해가요. 정의가 유린돼요. 그러면 어떻게 돼요? 그래도 책을 읽고 있어야할까요? 연구실이 거의 서고처럼 보일만큼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인데요. 그렇지만 정의가 유린 되고 양심이 조롱당하고 민주주의가 배반당하고, 사람들이 이유 없이 죽어가도 원인이 밝혀지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가난해지고 피 눈물을 흘리고. 그런 걸 보면서도 저는 연구실에 앉아서 논어 공자를 외우고 있을 수만은 없었어요. 공부를 하면서도 목소리도 좀 내는게 필요해요. 놈 촘스키는 세계적인 언어학자임에도 불구하고 평화와 정의를 위해 활동하고 있거든요. 80이 넘었는데도 계속 발언을 하고 행동을 하잖아요.
끊임없는 독서와 끊임없는 성찰입니다. 크고자 하거든 큰 학문을 하고 깊이 생각할수록 겸손해지고 자기를 비워내고 그게 제일 큰 학문이에요. 자기 자신만을 위해 공부하면 큰 학문이 나올 수가 없더라고요. 인류의 스승이라고 하는 공자, 맹자, 간디, 슈바이처는 한결 같이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았던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고 국민들을 위하고 어려운 노예 상태에 있는 백성들을 해방시키려하고 낮은 곳으로 갔죠. 부처님도 왕자였지만 그 자리를 박차고 생로병사에 고통받는 민중들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과 부대끼면서 그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알고 슬픔도 기쁨도 같이 나눴죠.
사실 저도 객관적으로 보면 안정된 직업과 귀여운 딸내미와 손주도 있으니 호의호식하면서 살아갈 수 있죠. 그렇지만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어려운 많은 사람들이 있기에 늘 공부하고 깨어 있어서 잊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제가 시골 사람이기에 요새 비가 오면 어떤 생각을 하냐면, 출근할 때 바짓가랑이가 젖고 길이 막히지만 모내기를 위해서는 참 다행이다. 소양댐에 물이 가득차면 흐뭇한 느낌이 들어요. '소양댐 밑에 사는 인천, 서울 사람이 물 공급을 잘 받을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합니다.
>>> 2탄에서 이어집니다.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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